봄이 오고부터 나는 길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웃 주민들의 집을 장식하는 꽃과 나무를 생생하게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빠른 작업을 위해 종이와 수채물감을 이용했다. 그리고 내가 눈으로 보는 것과 손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이 작업은 눈과 손의 합작이었다. 즉석에서 탄생한 선은 나의 작업에 생기를 더해주었고 나는 순간의 모양에서 발생하는 고유의 미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붓을 쥔 나의 손이 꼭 그와 같은 선을 쓴다는 생각에 흥분했는데, 나의 그림 속 뭉툭한 형태는 둥글둥글한 내 손가락과 같은 모양이었고 흔들거리는 붓질은 늘 힘이 빠져있는 그 감촉과 같았다. 나는 나의 손에서 탄생한 선과 형태, 붓질을 더욱 가치 있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종이 위에 나타난 것들이 내 머릿속의 어떤 의도를 배제하고서라도 나와 아주 긴밀하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화면에 뾰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드로잉의 대상은 주택가의 풍경, 식물, 건물로 다양했지만 그 중 내가 가장 매력을 느낀 대상은 화분이었다. 이웃 주민들에 의해 길러지는 이 화분들은 주인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나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기도 했다. 그 주변을 지나가는 우리 모두가 자라난 식물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화초들에 관심이 없거나, 너무 익숙한 나머지 그 존재감이 마치 없는 것과 같아졌다면 화분과 식물은 풀무더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겠지만 나는 그 모습이 매우 다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각기 알맞은 화분에 키 맞춰 피어있는 식물들은 이상하리만치 우리의 운명을 자각하게 했다. 그것은 그 존재가 우리가 속한 세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작업은 가능한 대상이 있는 공간에서 진행됐으므로 나는 꽤 많은 시간을 들여 그것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식물 중에는 아주 오래 된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계절을 맞아 새로 들여온 것이었다. 화훼단지에 가는 것이 즐거운 어른들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부지런히 새 풍경을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리고 돌고 돌아 꺼내지는 화분과 장독, 물 주전자와 가위, 조명 장식과 수세미···. 이곳에 이렇게, 언뜻 쓸모없어 보일 수 있는 것들은 의자 하나까지도 주인이 없는 것이 없었으며 너무나 많아 이제는 넘쳐난다는 표현이 어울릴 모든 것들이 한 공간에 모여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작업에서 이러한 자연과 인공, 인간과 비인간, 서로가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조화를 다루었다.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받은 시각, 촉각, 청각적 감각을 화면 안에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노란 하늘과 그 아래 흔들거리는 식물들의 모습으로 채워진 화면에는 누군가의 신발 끄트머리조차 등장하지 않지만, 그 밖 어딘가엔 우리가 있다. 더운 굳이 그늘을 찾아 나와 수다를 떠는, 어느 날 아침 햇볕에 뜨겁게 익은 토마토를 따가는, 어제와 다르게 화분의 배치를 바꿔보고는 물을 주는 사람들 옆에, 그들의 손길을 거친 대상을 관찰하고 종이에 휘갈기는 내가 있다. 이곳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개별의 것으로 딱딱하게 구분되지 않으며 나 또한 화면에 나타난 무언가를 대할 때 그것을 피사체로써 다루지 않았다. 때문에 회화 속 개체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각각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어울린다. 나는 내게서 나온 유연한 선과 중간 정도의 명도, 채도를 가진 색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그 바람대로 되었을 때면 붓을 내려놓고 나의 존재를 상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