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는 풍경
경험하는 풍경
오엔, 2024, 캔버스에 유채, 130.3 × 162.2 cm
나의 회화는 서울 도시를 오가며 관찰한 일상의 풍경을 대상으로 한다. 학교는 마포구에, 일터는 강남구에, 집은 용산구에 있어 이동의 범위가 넓어진 나는 올해부터 더욱 몸을 많이 쓰게 되었다. 작업은 많은 경우 머리보단 몸에 의해 이루어진다. 소재를 찾기 위해 행한 산책도, 그 때에 발생하는 시각, 후각, 촉각의 신체적 감각도, 작업실로 돌아와 경험한 것을 회화로 재창조하는 것 역시 결국 나의 팔과 다리를 움직여 해내야하는 행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그림 또한 그 물성과 실체를 증거로 하여 내가 다시 무언가 해내었음을 증명한다. 여기서 내가 신체적 행위로 규정한 '봄', 즉 실시간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눈의 감각을 굳이 구분짓자면 '생각함'과 반대 의미로 해석 할 수있다. 생각은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생각으로 떠올린 형상은 결코 시시각각 변화하는 실제와 동일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을 진짜로 보았다 한들 회화로 옮겨낸 시점에서 원형은 변한다. 이러한 인간적 한계를 몸소 느낀 이상 나는 흘러가는 세상을 부지런히 쫓아가며 더 빠르게, 더 많은 작업을 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나의 이동반경 세 곳을 통하는 경로는 다양하지만 공교롭게 모두 강으로 연결되는 장소이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한 올해 가을을 기점으로 서울 자전거 따릉이 정기 이용권을 결제하고 집 밖을 나설 때면 가방에 드로잉 재료를 와르르 쏟았다. 강변을 떠도는 시간은 집이나 작업실처럼 비교적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상을 떠난다는 점에서 잠깐의 여행과 같다. 그러나 평상시의 나와 무관한것만 같은 강가의 다리와 도로의 이정표, 그 비슷한 시멘트로 만들어진 세상도 알고보면 엄연히 나의 시공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게 주어진 진짜 삶일까. 이 아리송한 감각이 곧바로 그리겠다는 욕구로 이어진다. 생경한 공간에 대한 호기심은 그것을 충실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어느정도 해소된다. 내게 있어 충실한 태도란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꼼꼼히 받아들이려는 의지와 그 실천이다. 확실히 대상을 원리에 맞게 그리는데 신경을 기울이기 보다는 빠르게 평면으로 양식화하는 것에 훨씬 관심이 크다. 그것을 그림으로 배출함으로써 그 존재가 나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장소에 호감을 느꼈다고 한들 그 곳에 텐트를 세우고 밤새 점령 할 수는 없을테니까. 게다가 내가 회화의 뮤즈로 찾는 장소는 그렇게 지내고 싶은 곳은 아니다. 일부러 어수선한 곳을 찾는다기 보다는 걷다보니 그렇다. 동네. 그러니까 주택가에서 출발했지만 편의점과 동사무소를 지나고, 버스정류장 몇 개를 지나고 보니 인적 드문 곳이 나왔다. 차도는 더 넓어지고 인도는 좁아졌다. 누가 잘 걸어다니지도 않고 마치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좁은 길이지만 어떻게 보면 딱 나하나 지나다니기 알맞은 길 같다. 그런데 자꾸 불안하다. 이 곳은 누군가 자주 드나들지 않는 만큼 잘 관리되어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필 쓰레기수거차량 주차구역을 지나치기도 하고, 인도까지 침범한 풀때기에 자꾸 부딪히다 상처가 남는다. 그리고 한달째 수리중인 성수대교의 엘레베이터. 이 엘레베이터를 타려는 사람이 나 말고는 없나보다. 나는 다리 위로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온 자전거에 무거운 가방까지 얹어 끌고 올라가야했다. 계단이 높고 많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중심잡기가 어려워 자꾸 넘어질뻔한다. 그러다 진짜 넘어진다.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려하지만 왠지 가슴이 간질거린다. 내가 계속해서 강조한 경험의 순간이다. 그러니 내게 더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욕심 같은 게 생길리 없다. 우리가 가진 평범한 풍경을 재현하고 있으므로, 나의 회화는 사실주의적 특성을 띄고있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사회적 메세지를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이야기를 만들지 않아도, 사실적 풍경을 그대로 보여내는 것으로 우리의 세상은 전보다 의미있어질 수 있다. 그리고 도시안의 어지럽고 누추한, 차갑고 튼튼한, 주택가와 강가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는 다시 작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