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가장 가까운 구립 도서관이 버스로 20분쯤 거리에 있는데, 가는 길에 작은 다리를 건넌다. 버스가 다리를 지나가는 시간은 10초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짧지만, 다리 위에서 녹색으로 물든 개천가를 내려다보며 나는 여름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과 그곳에 모처럼 알맞게 스며들어 운동하는 미니어처 같은 사람들의 풍경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것이 나를 자극했다. 이곳은 물과 자연이 어우러져 있는 곳으로 지난날 한강을 배경으로 작업하던 때와 장소의 성격이 비슷한 것 같지만, 규모가 훨씬 작고 오밀조밀하며 더 많은 이들이 밀집해 있다는 점에서 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과거 한강 작업을 할 때 나의 관심은 세계가 박동하는 총체적이고 거시적인 감각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풍경의 웅장함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하여 회화에 인물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유한 삶의 형태를 지닌 개별의 대상들이 내 시야 안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기에 인물을 적극적으로 등장시켜 작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만 그 인물이 주인공으로 튀기보다는 공간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관건으로 삼아 붓을 움직였다.
내가 화면에 등장시키고 싶은 이들은 익명의 존재들로 특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지만 모아보니 몇 가지 공통점은 있다. 나와 면식이 있는 사람보다는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이들이자 지극히 평범한 사람. 가만히 앉아 깊은 상념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저마다 무언가 구체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일상을 보내느라 나를, 회화로 치면 화면 밖의 감상자를 전혀 의식하지못한다.
이전부터 나는 종종 새벽같이 일어나 등교하는 학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묘한 위로를 받곤 했다.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장소만을 오가면서도 매일 성실하게 현관을 나서는 그 단단함이 내 안의 비대해진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어 준다고나 할까. 그것이 비록 고단한 일정일지라도, 묵묵히 행하는 자의 뒷모습은 결코 괴로워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거리에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타인의 성실한 일상은 내가 이 거대한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내가 그들의 평범함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것이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게 되면서 나는 주택이 밀집한 골목길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모르는 골목길로 들어서 보고,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포착되면 조심스레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어느새 더워진 날씨에 집마다 내놓은 화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본가에 살 적부터 동네 할머니들이 화초를 가꾸는 모습을 보며 나는 식물을 기르는 것이 참으로 순수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나도 몇 번인가 화분을 사본 적이 있지만 결국 끝까지 돌보지 못해 할머니의 몫이 되기 일쑤였다. ‘꽃이 좋아지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라는 말이 꼭 참은 아니지만 젊은 사람으로서 마당이나 베란다에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는 정성 들여 물을 주고 상추나 허브를 조금 키워 식탁에 올려도 보지만 이내 일상이 바빠지면 시들어 죽게 만드는 경험을 반복하곤 한다. 반면 어르신들이 식물을 자라게 하는 솜씨는 감탄을 자아낸다. 오랜 세월을 치열하게 살아온 이들은 삶의 늘그막에 이르러 자신의 보금자리를 다듬고, 그곳에 작은 생명들을 잘 자라게 하는 것에 전념한다. 식물과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순박함을 느끼는 건 그것이 삶의 오랜 여정을 거쳐 다시 근원으로 되돌아온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손길로 탄생한 골목 특유의 다정한 분위기를 화면으로 옮겨온 그림이 <골목과 집>과 <물 주는 남자>이다. 이전의 실내 작업에서 객관성에 치우쳐 화면을 의도적으로 밋밋하게 누르고 절제했다면, 이 골목 풍경에 이르러서는 시점을 왜곡하기도 하고, 보여주고 싶은 초록의 크기를 부풀려 설정함으로 싱그러운 생명력을 화면에 재현하려 노력했다. 붓질 역시 전보다 한층 유연하다. 밝고 순수한 느낌을 불어넣고 싶었던 만큼 이 그림들에서는 색조가 탁해지지 않는 것이 중요했기에 흰색의 사용을 최소화하여 맑은 채도를 유지하려 애썼다. 완성된 형상이 정말 ‘그림’과 같아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림 같다는 말은 너무 막연할 수 있으니 그림책 이라고 해야겠다. 나의 회화가 언제나 한 장의 그림책처럼 감상자에게 따뜻함과 편안함이라는 정서를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랐다.
작품의 전면에는 각각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어린아이이고 다른 하나는 노인이다. 이들은 내게 있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고독에 빠진 젊은이도 아니며 호기심을 자아내는 묘연의 여인도 아닌, 주류의 시선 밖에서 이 세계의 일상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존재들. 이 같은 맥락 안에서 작업을 진행 하는 동안 내가 자화상을 그리게 될 확률도 적을 테지만 만일 대상이 나 자신이 될지라도 그 모습이 작업실 한 구석에 앉아 물끄러미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시선은 골목을 넘어 동네의 소박한 상가 풍경으로 이어진다. <화분이 있는 가게>는 세종대 부근에 위치한 작은 부동산의 전경을 재현한 그림이다. 내가 그 앞을 지나쳐갈 때 그곳은 부동산이라는 본래의 목적과는 무관하게 온통 화분으로 둘러싸여 있어 유독 눈에 띄었다. <조명 가게> 역시 마찬가지다. 두 상가 안에는 모두 60대쯤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앉아 있었다. 늘 그래왔을 것처럼 익숙한 차림으로 익숙한 책상에 앉아 누군가는 전화를 받고, 누군가는 컴퓨터를 쳐다보며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친정집에 계시는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분들이 우리 할머니처럼 화초들을 매일 아침 정성스레 가꾸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더 이상 놓일 공간도 없는 좁은 바닥에 자꾸만 화분을 가져다 놓으며 일상을 장식하는 마음. 그 귀엽고 재미있는 풍경을 상상하는 일이 내게 그림을 그릴 명분이 되어준다. 이러한 발견 덕분에 그림 또한 한층 유쾌한 호흡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한국의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간판과 통유리창이 달린 낮은 1층 건물. 세탁소나 이발소, 부동산의 형태로 자주 쓰이는 정겨운 구식의 건물들. 그리고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온갖 자질구레한 소품들. 삭막한 도심의 일터 속에서 수많은 식물로 벽을 세운 그들은 스스로를 안온한 온실 속에 넣으려 하는 사랑스러운 인물같다.